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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마법사]

[기독교] 여섯걸음 -원유경-

by 꿈꾸는 파도 2023.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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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인도자, 사역자, 모든 예배자를 위한 책 

이라고 적고 싶다.

포드처치 비전.
우연히 이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책 구입 슈슝.

책 제목 '여섯 걸음'의 뜻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간의 최선인 다윗의 여섯 걸음

(여섯 걸음마다 한 번씩 멈춰 서서 살진 소를 잡아 예배하던 다윗의 행렬)

뒤에 하나님의 완성을 상징하는 7(완전수)이 온다는 뜻으로 우리의

'여섯 걸음' 이후 '하나님의 완성'을 기대하는 마음을 담았다. 

--> 블레셋 땅에서 법궤를 나를 때 다윗이 기뻐서 여섯 걸음마다 소를 번제로 

드렸던 그 예배를 본받고 싶어서 여섯 걸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나의 밑줄..

 

사랑과 책임이란 고통을 전제할 때 완성된다.

(프롤로그. 동물실험에서 무통분만으로 낳았더니 새끼를 낳고도 본체만체함)

 

나는 매일 사랑하는 만큼

두렵고 고통스러웠다.

사랑했기 때문에 더욱 두려웠다.

두려움은 내게 사랑의 징벌이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매일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 -18P

 

 

내 행복의 역치는 고작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살아서 내 곁에 있는 거였다.

비극은 나의 삶이었다. -21P

 

목마름이란 사랑에 수반되는 것이다. 어느 유행사 가사처럼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연인을 향한

충만한 애정과 그리움의 상태로서 말이다. -26P

 

"만약 여러분이 배를 짓고자 한다면,  더 많은 나무를 얻고, 일을 나누고, 지시하는데 

많은 힘을 쓰지 말라. 다만 사람들에게 광대하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갈망을 가르쳐라" -28P

 

나는 단지 하나님을 끝까지 가슴으로 사랑하고 싶었다. 식지 않는 사랑, 유일한 사랑으로, 이것이

내 사랑의 긍지였다. 이 사랑으로 내 존재를 대변하고 싶었다. 29P

 

로마서 말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롬 2:21)처럼 예배에 관해 

아는 것과 실제 예배하는 것은 완전히 일치해야 했다. 

결국 이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질이 좌우한다.  30P

 

이 부름이 원어로는 "I long for your smell"(나는 당신의 체취를 갈망합니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을 "아바"라 부르며 이 갈망을 표현하는 게 더없이 좋았다.

이 부름 속에서 서로를 향한 존재적 기쁨을 누리는 것이 내가 누리는 예배의 환희였다. 31P

 

내 영혼은 극도로 예민했다. 내 사랑이 더는 현재진행형이 아닐까 봐. 54P

 

나는 청년들이 미래를 대비해 수많은 자기 계발 프로그램을 듣고 다양한 적금과 보험은

가입하면서, 정작 하나님께 미래를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에는 무관심한 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미래가 누구에게 달려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적기 교육 (중략) 늦어도 청년의 때에 완성돼야 한다. 61P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믿음."

바로 이것이 믿음의 영점 조준이다. 단순하다. 그런데 이 단순한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청년은 드물다. 이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께 '올인(ALL IN)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전부를 걸면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가 되어 주신다.

(중략) 인생의 원씽(ONE THING) (중략) 곧 가치 기준을 정하지 않은 채 세상적인 

성공 기준을 학습하고 맹목적으로 달려간다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의 질서와

영적 태도를 배울 골든 타임을 놓치게 된다. 62p

 

예배 드림은 인생 최고의 영광이다. 71P

 

하나님 앞에 사랑을 드릴 자 있는가? 이 특권을 누릴 자 있는가? 

이 세대는 가장 앞서 이 특권부터 누려야 한다. 부디 이를 하찮게 여기는 자들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부디 이 특권을 포기하는 이들이 없길 바랄 뿐이다. 72P

 

77P

그분은 최상의 '조건'을 허락하시는 게 아니라 '변화'를 약속하신다.

그분이 이루실 무한한 변화를 꿈꾸길 바라신다.

단지 가능성의 땅에 세우기보다 우리 자체가 그분의 가능성이길 원한 신다.

 

이 영적 근성은 저절로 길러지지 않는다. 

처절한 몸부림만 있다는 것을. 결국 부딪혀봐야 목마름과 야성이 내 것이 되고,

그때 몸부림을 통해 변화가 일어난다. 

 

예배 중보 기도 모임부터 세웠다. 기도의 헌신 없이는 예배가 세워질 수 없다.

기도만이 모든 사역의 엔진이다. 78P

 

아버지는 이 노동을 삶(기도)의 일부로 받아들이셨다. 힘들고 피곤해도, 춥고

덥고 불편해도, 열악한 상황에서도, 응답이 더디고 기다림이 길어져도 인생에서

기도라는 상수는 변함없이 지키셨다. 79P

 

기도는 그저 하나님 앞에 선 영혼의 마땅한 태도이고, 가장 건강한 존재 방식이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드러낸다. 어떻게 예배하는지를 보면 어떻게 사는지가

보인다.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갈망, 사랑의 온도, 집중력, 관계적 친밀감, 전부를 쏟는

충분한 몰입, 이 모든 것이 예배 안에 여실히 드러난다. 적당히 예배하면서 최상의 삶을 

기대하지 마라, 예배에 소홀하면서 삶을 자신하지 마라. 그 삶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이다.

(중략) 따라서 삶은 예배의 수준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 -81P

 

또 기도는 갈망의 순도를 높인다. 기도가 쌓인 예배는 임재의 밀도가 다르며,

예배자의 눈물의 농도가 다르다. 기도는 사역을 위해서도 존재하지만, 기도 자체가

사역이며, 기도만큼 유익한 사역은 없다고 믿는다.  82P

 

'오로지 기도에 집중해라. 대안을 찾지 마라. 대체 활동을 느리지 마라. 

요란한 행사로 시선을 끌지 마라. 얄팍한 전략을 끌어들이지 마라." 83P

 

영적 리더는 언제나 '다음'을 위한 기도를 '지금' 드려야 한다. 85P

 

은혜를 지속할 유일한 힘은 '겸손'이다. 엎으린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87P

 

하지만 예배의 목적과 의지가 충분해도 마음의 싸움이 쉬워지는 건 아니었다.

이 싸움은 반복한다고 해서 수월해지거나 쉽게 이겨낼 요령이 생기지 않았다.

그저 매 순간 애써 결단해야 했다. 마음이 하늘을 향하도록, 땅을 보지 않도록.

88P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느냐'이다. 91P

 

질병이 내 얼굴을 찌그러뜨릴망정 내 영혼까지는 때려눕히지 못하도록.

육신의 고통이 내 영혼 깊이 새겨진 하나님의 선하심을 훼손하지 않도록.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아픔이 더 큰 사랑의 이유가 된다면, 내 삶이

이 아픔마저도 꼭 끌어안도록.... 93P

 

결국 영혼을 뚫어내는 건 본질의 힘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말씀은 그 자체로 능력이 있다. 

'오직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과 '단 1명도 은혜 없이 

돌아가지 않게 하는 데 전부를 거는 것 '이었다.

사역자는 목양과 기도에 가장 많은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94P

 

이 프로그램이 왜 필요한지 정확히 답할 수 없는 것들은 하지 말아야 해. 95p

 

우리는 인생 가운데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숱하게 만난다.

그럴 때 답을 쉽게 쓰지 못하거나 문제 풀이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어려운 수학 문제에 머리가 아프듯이 답이 보이지 않는 삶의 문제 앞에서 영혼은

진통을 겪는다. 하지만 미지의 수학 문제를 풀 때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뉴런이 

왕성하게 생성되고 지적 능력이 계발되듯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영혼의 신음을

통해 영적 세포도 활발히 생성되고 영성도 계발된다.

 

이 문제 풀이 과정은 바로 기도의 씨름이다. 하나님의 뜻과 계시는 객관식 답안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엎드려 머물러야 한다. 그만큼 하늘이 열리기 때문이다. 105P

 

"본회퍼가 미국으로의 망명과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나치 치하의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게 우리 나이쯤이었어. 누군가에겐 젊은 전체를 걸고 축적한 것들을

제로로 만들고, 가장 중요한 가치를 위해 모든 걸 걸어야 하는 때가 오는 것 같아." 106P

 

내가 가장 경계했던 건 경험적인 성과에 기대는 마음이었다. 107P

 

기드온 혹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주셨던 사명처럼 강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부르심이 있다. 우리는 이런 부르심에 '불가능'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모른다. 

그 앞에 서면 떨고 두려워하며 침묵하거나 멈춰 서게 된다.

그러나 진정 하늘의 부르심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하신다(엡 1:18:19) 111P

 

일본의 유명 작가인 이츠키 히로유키는 그의 책 <타력>에서 '나 이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내 삶의 방식을 떠받치고 있다'라는 겸허한 인식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편의 힘을 '타력'이라 명명하며, 이 타력을 의식하는 것에서 인생의 비상시를

살아가는 태도를 갖출 수 있다고 한다. 112P

 

나룻배 위에서 오로지 바람을 의식하는 사공처럼 말이다. 바람의 '낌새'를 살피는 기다림.

 

"바람이 없어도 굴하지 않고 가만히 바람을 기다리며 언제라도 바람에 대응하는 긴장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시간은 '무력한 시간'이 아니다.

'오로지 타력을 의식하는 자력의 시간'이자 '가만히 바람을 기다리며 언제라도 바람에 

대응할 수 있는 긴장감'이 필요한 시간이다. 113P

 

이때 필요한 건 '믿음의 오조준'이다. 현실과 상식에 대해 과감하게 틀려야 믿음에선

이긴다. 보이지 않는 길 위에 과감한 한 발을 내딛고, 어떤 대가 지불이든 감당하리라는

각오를 해야 승자가 될 수 있다. 122P

 

청년 시절에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사장 위대한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마음이다. 124P

 

그리고 그들에게 주고 싶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부르심 하나로 떨리는 가슴'

이었다. 125P

 

나는 언제나 내 비전과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단연 중보자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너무 바빠서 기도할 수 없을 때, 내가 활과 검을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실전 상황에서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의 후방 지원을 해준다면, 영적 사역에 완벽한 하모니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기도가 예배와 사역의 실제적인 동력이자 전술이라는 건 이론이 아니다. 영에 속한 것을

함께 보고, 맞서고, 짊어지고, 신음하는 동역의 신비를 느끼며 교회를 섬기길 소망했다. 129P

 

어떤 조직이든 체계가 잘 갖춰지면 위험이 따른다. 바로 마음의 실종과 본질의 부재이다. 131P

 

'나의 필생의 사명은 무엇인가?'

'오직 나만이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우리 교회의 고유한 부르심은 무엇인가?'

'마지막 시대에 이 교회가 주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132P

 

비는 대상을 향한 관심은 사라지고, 일방적인 제의만 남는다. 

이게 바로 종교 아닌가.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이 시대의 예배와 신앙생활이 이처럼 종교화됐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그분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어느새 그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예배를 드리며,

그보다 우리의 신앙 규칙과 준수, 감정의 충족, 기도 응답만이

중요해졌다. 자기 백성에게 잊힌 존재로 전락한 것,

이것이 하나님의 고통이었다. 134P

 

바로 베다니였다. 베다니는 '벧 아니' 곧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이다. (중략) 그분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 곁에 잠시

머무르셨던 것이다. 135P

 

나는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교회가 그분에게 이 베다니 같기를

원한다. 나의 영혼이 그분에게 베다니 같기를 소망한다. 

 

이 땅을 굽어살피셨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시대 속,

이 패역한 세대 안에서도 그분을 순전하게 사랑하는 자들이 있는 곳,

그런 곳이 우리 예배이길, 우리 교회이길 원한다.

예배의 동력은 오직 이 사랑이 되어야 한다. 136P

 

하나님 앞에 꾸준한 태도와 마르지 않는 갈망으로 이 정성을 늘

기꺼이 구별하는 것 말이다. 137P

 

이는 리더의 무계획과 무책임도 아니고 경솔과 방종도 아니다.

공급자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의존이다. 139P

 

예배를 향한 그치지 않는 갈망과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타는

목마름

 

하나님을 위해 꿈꾸는 것은 무력하지 않았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내가 살아가는 일이 되었다.

이것이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임을 느낀다.

 

나의 사랑하는 교회가

이 시대의 나팔이 되기를 원한다.

이 시대의 등불이 되기를 원한다. 143P

 

고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이 90년간 살면서 깨달은

성공 비밀은 '마음가짐이 모든 걸 결정한다'라는 거였다.

라틴어 격언에 "일의 완성보다 일하는 사람의 완성이 중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얼마나 탁월하게 일을 잘하느냐'보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인격과 성품과 마음의 동기가 온전하게 훈련되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거다. 149P

 

막내(다윗) '막내'라는 단어 원어는 '하찮은, 필요 없는'이라는 뜻을 지닌다.

156P

 

두려움과 싸우려 하면 답이 없다. 사랑을 따라야 답이 보인다. 문제보다

크신 주님을 보는 것,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인생에 찾아온 골리앗과 맞서는 방법이다. 179P

 

제임스 존스턴은 다윗의 시편과 그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 당신의 믿음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

나님이 지혜로우시다는 것,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선하시다는 것,

하나님이 모든 순간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 당신은 생각

그리고 감정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의 순간, 우리의 믿음은 마음속에 수많은 내전을 일으킨다.

그러나 기다림은 끝내 믿음의 승리를 가져다준다. 왕의 말들이 사막에서

갈증의 고통을 해소할 오아시스를 눈앞에 두고도 주인의 호각 소리에 

모든 것을 멈추고 기다리듯이.

인생의 광야에서 기다림의 믿음은 마침내 우리가 왕을 섬기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표식이 될 것이다. 212P

 

정신 차리자. 우리의 인생은 '영원'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한 존재다. 이 목적을 이해하고 이 목적 위에

인생을 세이길 원한다면, 이제 일어나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하지 않는

잔존 세력을 완전히 진멸해야 한다. 

 

자, 그렇다면 이 견고한 적진은 어디에 있을까? 세상 정치 세력 가운데?

사악한 문화 사상 가운데? 아니다. 가장 먼저 진멸해야 할 세력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하는 

적군의 요새가 있다. 십자가에 굴복하지 않는 나의 의, 은혜에 저항하는

나의 교만, 거룩한 통치를 거부하는 나의 정욕이 진정으로 정복해야 할 

적의 요새다 223P

 

또 인생의 번영에 기대어 안전을 추구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배운다. 226P

 

프라미드의 견고함.

쓰러질 것은 처음부터 쓰러뜨리고, 기울어진 것은 처음부터 기울여 놓아

4천여 년이 지나도록 끄떡없이 건재한 건축물. 230P

 

다윗은 자신에게 허락된 성공과 번영을 은혜 안에서 해석했다. 232P

 

다윗의 원씽

 

내가 여화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화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편 4절 236P

 

<시와 산책>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 사람의 마음은 가장 커진다. 너무 커서 거기에는 

바다도 있고 벼랑도 있고 낮과 밤이 동시에 있다." 241P

 

어디든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기만 해도 효력이 있을 거라고 믿을 뿐,

하나님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정말이지 발칙한 믿음이다 247P

 

통장 잔고 하나 늘려주지 못하는 하나님, 질병 하나 고치지 못하는 

하나님, 내 사업과 인간관계와 스펙과 일상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하나님' 운운하며 하나님의 '쓸모'가 사라지면 금세

그분의 존재마저 부정해 버리는 사람들. 그들은 말한다.

 

"예수 믿어도 잘되는 일 하나 없던데, 믿어서 뭐 해요. 쩨쩨하게

기도 하나 속 시원하게 들어주시지 않는 분이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인가요?"

 

실망과 좌절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신앙이 결국

하나님의 이용 가치를 따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해주시는 분이라는 기대만 가득할 뿐, 그분 자체를 알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픈 갈망은 찾아볼 수 없다.

 

왜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목적 자체가 되시질 못할까? 그분은 

언제나 행복을 위한 수단이셔야 할까? 이러한 마음의 동기로는

결코 그분을 우리 중심에 모실 수 없다.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되시지

못한다. 결국 언약궤가 이스라엘 변방에 70년 동안 방치되었듯이

하나님의 존재가 삶의 가장자리로 내몰려서 기억조차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에는 잊힌 언약궤의 존재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던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자리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그분의 가치를 바로 세우길 간절히 원했다. 바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이었다. 248P

 

그는 아무도 없는 고독한 들판에서조차 주님의 임재만으로 충분했으며

초라한 베들레헴 에브라다의 목초지에서도 하나님의 영광 보기를 

사모하던 사람이었다. 250P

 

주 여화와 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이 구절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는 주님의 임재와 영광 앞에 미천한 자신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삶이 해석됐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

아니면, 그분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될 수 없음을 알았다.

 

어쩌면 다윗의 중심을 배우기 위해 인생에 던질 두 번째 질문

'하나님만이 목적이 되는가?'를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하나님 앞에 앉아보았는가?" 251P

 

어느 신학자는 오벧에돔에서 예루살렘까지 21킬로미터의

길이 온통 피로 물들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 의식이 

아무리 숭고하고 경건했을지라도 사방에서 피비린내와 땀내가

진동하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수고가 이렇다. 그분께 디리는 최선이

꼭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때 흘리는 땀과 눈물, 헌금과

수고와 손길은 우리의 마음이 표현된 구체적인 실물이다.

그러니 결코 생략할 수 없고, 생략해선 안된다. 

 

그저 오랫동안 꿈꿔온 예배를 주님께 드리고 싶다. 조직과 체계와

성공 시스템과 습관과 타성에 젖은 예배에서 벗어나, 영적 야성이

살이 있는 예배, 가난하고 깨어진 심령으로 드려는 예배, 타는

목마름으로 부르짖는 예배, 전심을 넘어선 특심의 예배 말이다. 261P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그의 시선 끝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다. 267P

 

당신의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

하는가? 우리의 존재는 주님의 통치가 인생 중심부에 오셔야 완성된다.

세상의 성공법에 기대어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마라. 자신의 공로에

기대어 존재를 과시하려 하지 마라. 270P

 

"아들아, 네가 인생을 살며 어떤 벽에 부딪힐 때 그 벽은 너를 막기

위한 게 아니야. 그 벽은 그것을 간절히 원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막아주기 위한 것이란다. 너를 그곳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지."

 

그러니 삶이 장애물, 인생의 벽 앞에서 절망하지 말라는 거다.

분노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장벽을 넘어 계속 그 길을 가라는 것이다.

인생에 장벽이 있는 건, 우리를 내몰거나 주저앉히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절실히 원하는지를 깨닫게 하려고 있는 

것이다. 절실하지 않은 사람은 장벽 앞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272P

 

다윗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중심에서

소용돌이치는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향한 목마름 때문에.

그래서 그 갈망으로 다시 돌아갔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기 위해 말씀 앞에 서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실패했던 자리, 좌절됐던 지점, 거절당한 그 장소로 돌아가서 

첫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예배란 내가 드리는 것으로 완성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실 때 완성되는 것임을 고백하면서

 

결국 인생의 동력은 갈망의 크기로 결정된다. 갈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인생은 전진한다. 갈망이 크고 깊을수록 인생의 보폭과 크기가 달라진다.

가장 높고 위대한 것을 갈망하라. 그것은 단연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 영광을 끊임없이 갈망하라. 그럴 때 우리 인생은 누구도 따라잡기

힘든 동력을 갖게 될 것이다. 273P

 

마음껏 울기 위해 광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찾아 먼 길을 왔습니다.

가슴으로 사랑을 알고 싶어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싶어서.

야성 없는 믿음은 갈망을 일고

갈망 없는 예배는 사랑을 잃습니다.

이제 쓸 우리의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274P

 

고 박완서 작가의 인터뷰집 <박완서의 말>에서 '우리 시대를

어떻게 보고 있냐'라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사랑이 있는 시대, 사랑이 있는 정치,

사랑이 있는 역사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자고로

우리는 사랑이 있는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어요.

 

우리 역사에 사랑이 개입해 본 적이 있나요. 우리 정치사에

사랑이 있어본 적이 있나요. 권력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사랑을 체험한 이야기가 있나요. 그러니까 우리 시대는 꿈이 없는

시대, 재미가 없는 시대, 상상력이 없는 시대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회복하는 일, 사랑의 능력을 되찾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랑이 가슴에 차있지 않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해방의

세계란 과학도 지식도 이론도 아니로 '사랑의 힘'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세상도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의 힘을 찾으며, 가슴에

사랑이 차있는 사람이 열어갈 미래를 꿈꾸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떤가? 예배는 어떤가? 교회의 본질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건 다 비본질이다. 사랑을 향한

갈망만이 예배의 기름부음이다. 275P

 

다른 것은 좀 부족해도 사랑이 있으면 된다. 사랑만큼은 포기하면

안 된다. 비록 무명의 삶이어도, 초라하고 볼품없어도 괜찮다. 단,

사랑의 기쁨을 잃어선 안 된다. 사랑 없는 지식은 공허하고,

사랑 없는 옳음은 무용하며, 사랑 없는 진리는 무력하다.

사랑이 없인 아무것도 아니다. 276P

 

다윗의 예배는 여섯 걸음마다 0점으로 돌아갔다. 

여섯 걸음을 걷고 멈췄다. 278P

 

한국의 위대한 석학 고 이어령 교수님은 <젊음의 탄생>에서

'젊음'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펭귄들은 떼를 지어 바다로 모여들지만, 정작 바다에 뛰어들기 

직전에 다 머뭇거린다고 한다. 바다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먹잇감도 있지만 이와 함께 천적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불확실한 바다를 향해 맨 먼저 뛰어드는 용감한 펭귄이 있다.

바로 '최초의 펭귄'이다. 최초의 펭귄이 첫 주자로 나서주면 그때까지

두려워서 머뭇거리던 다른 펭귄들도 일제히 그 뒤를 따라 바다로

뛰어든다고 한다. 278P

 

불확실하지만 일단 저지르는 것. 끝없이 회의하다가도 순간적인 직관이나

느낌을 따라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 저자는 "이것이 바로 젊음이 아닐까?"

라고 이야기한다. 모두가 하나같이 무언가를 원하고 얻기 위해 달려가지만,

정작 그 앞에서 머뭇거릴 때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향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패기가 바로 젊음의 증거라는 것이다. 2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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